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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선/정용기

충북선/정용기

 

 

 

 

 

다음 생에는

충북선 기찻길 가까운 산골짜기에

볕바른 집을 마련해야지.

3, 8일에 서는 제천 장날이면

조치원 오송 충주를 지나오는 기차를 타고

터키석 반지를 낀 고운 여자랑

제천 역전시장을 가야지.

무쇠 솥에서 끓여내는 국밥을 사 먹고 돌아다니다가

또 출출해지면 수수부꾸미를 사 먹어야지.

태백산맥을 넘어온 가자미를 살까

어떤 할미의 깐 도라지를 살까 기웃거리다가

꽃봉오리 맺힌 야래향 화분 하나 사고

귀가 쫑긋한 강아지도 한 마리 사서 안고

돌아오는 기차를 타야지.

손잡고 창 너머로 지는 저녁 해를 보다가

삼탄역이나 달천역쯤에 내려서 집으로 와야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산그늘로 숨어들어야지.

소쩍새 소리 아련한 밤이면

둘이 나란히 엎드려 시집을 읽을까,

스메타나의 몰다우를 들을까.

어쨌거나 다음 생에는

충북선 가까운 곳에 살아야지.

 

 

 

 

 

 

 

 Bucket list-버킷 리스트,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을 작성한 목록이란 뜻이다. 유행이라도 하는지, 버킷 리스트의 양식까지 있다 한다. 그러나, 막상 하고 싶은 일들을 작성하고자 펜을 든다면, 과연 내가 평소 무엇을 하고 싶어 했던 걸까, 다소 막연하기조차 할 것이다. 하고 싶은 것 보다는, 해야만 할, 해치워야 할 것들이 다반사인, 그러므로 그저, 일상의 매너리즘에 빠져 하루를 메꿔가는 대다수의 우리에게 버킷 리스트의 작성과 실행은, 로또 당첨의 기적처럼 허황된 것일 수도 있는데.

하지만, 잠시 먼 산 바라보며 실행하기 쉬운 것부터 몇 개 적어보는 것만으로도, 일상의 굴레를 벗어나, 잠깐이나마 행복한 금수저일 것 같은 착각에 빠져보는 것, 이 또한 마음의 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충북선의 정용기는, 시적 논의를 떠나 다음 생의 버킷 리스트를 이미 작성해 놓은 셈이다. 욕심스럽다거나 거창하지 않은, 소박하기 그지없는 소시민의 그것. 그렇다면 그는 왜 지금 하고 싶은 일을 진술하지 않고 다음 생의 것을 토로한 걸까. 도무지 반전의 기미를 뵈지 않는 현실을 수긍해서일까, 아님 또 다른 희망사항이거나 욕심인 걸까. 하지만 아무렴 어떠랴,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 있다면, 그건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존재임에 틀림없는 것, 뜻대로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없기에 인간인 것이다. 하여 함박눈 쌓인 어느 날, 무작정 충북선 타고 떠나보는 것 자체가, 누군가 작성할 버킷 리스트의 첫 번째 목록이 될 수도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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